8월 23일 사의 찬미를 봤다. 사의 찬미는 윤심덕의 노래로 유명하므로 누구든 이 뮤지컬이 윤심덕과 관련된 이야기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전에는 '글루미 데이'란 제목으로 올라왔다가 이번 해부터 '사의 찬미'라고 제목이 변경된 극으로 이번에야 나와 일정이 맞아 볼 수 있게 된 극이다.
여러 일정들이 꼬이고 꼬여 조금 복잡하던 참에 23일 저녁 시간이 비었고 마침 안유진 배우가 나오는 날인데다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메르스 대책으로 내놓은 1+1 티켓이 가능한 공연이어서 자리를 잡아 가격도 매우 저렴하게 보게 된 공연이다.
처음 예상할 때는 김우진과 윤심덕이 주를 이루고 사내의 비중이 적을 것이라고 막연히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사내의 비중이 매우 높았다. 사내 역의 이규형 배우는 내 기억에 있는 배우는 아니었는데 연극에서 어쩌면 봤을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긴 했다.
광막한 광야를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러 가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에 나 죽으면 그만일까
행복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설움
어린 나이에 들었던 노래가사가 뇌리에 박힌 어느날 이 노래는 무슨 노래냐고 부모님께 여쭈어보았고, 윤심덕의 노래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자세한 이야기는 안해주셨지만 얼마 가지 않아 김우진과 윤심덕에 대한 이야기를 알게 되었다.
이 뮤지컬을 보기 전에 막연히 생각했던 것은 사내의 비중 외에도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윤심덕 배역의 배우가 사의 찬미를 여러번 부를 것이란 생각이었다. 이 생각도 뮤지컬을 보면서 엇나갔음을 깨달았다. 사의 찬미 테라라고 불러도 될 지는 모르지만 사의 찬미 선율은 이 극의 상당 부분을 감싸고 있다. 하지만 윤심덕이 노래를 부르는 것은 단 한 번 뿐이다. 실제 이야기를 모른다면 조금 의아하게 여길 수 있을 만큼 극은 불친절하지만 워낙 유명한 일화들이라 윤심덕의 경성에서의 스캔들과 그녀를 둘러싼 가난, 그리고 김우진과의 사랑까지 이해하기 어렵지는 않았다. 오히려 어느 정도 감추어진 형태로 남아있는 것이 나을 수도 있겠단 생각도 들 정도였다.
이 극에서 사내는 완벽하게 주도권을 쥐고 있다. 김우진에게 극본을 쓰기를 강요하면서 둘의 운명을 조종하지만 이 사내의 실체라는 것이 아주 가끔 의심스러워질 때가 있었다. 그것은 마치 사내가 김우진의 또 다른 면과 같다는 생각이 들 때였다. 비극적인 결말, 극본 사의 찬미의 결말, 그 결말을 향해 치닫는 여러 움직임.
이 사내가 관부연락선에 탑승하면서부터 그리고 김우진과 윤심덕을 압박하기 시작하면서부터 그 오래전부터 이어져오던 관계들이 블럭을 쌓듯 차곡차곡 펼쳐지면서 알 수 없는 사내의 존재감은 점점 더 극을 잠식해 들어갔다.
약간 아쉽게 느낀 것은 김우진 역의 이충주 배우였다. 연기가 좀 늘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심약한 김우진 역에는 그렇게 잘 어울리지 않았다. 나머지 두 배역은 꽤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외면의 강함 속의 살짝 내비쳐지는 내면의 유약함이 드러나는 윤심덕 역의 안유진 배우도 좋았고 전체적으로 극을 쥐락펴락했던 사내 역의 이규형 배우도 좋았다.
발표되지 않았던 가상의 극본 '사의 찬미'의 결말을 둘러싸고 1926년과 둘이 처음 만나던 해부터 관부연락선을 탈 때까지의 시간이 교차하는 부분도 흥미로웠다. 계속해서 어딘가에 섞여 들려오는 사의 찬미 테마도 인상적이었으며 약간 엔카느낌이 드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흥미롭게 본 것은 이탈리아에서 둘을 목격했다는 목격담까지 녹여낸 사의 찬미 결말 부분 원고였다. 사내의 손에서 벗어나 바다로 뛰어든 둘에게 바다는 새로운 세상이었던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을 했다. 시신으로도 돌아오지 못했던 두 사람. 사내의 말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두 사람. 남은 것은 윤심덕의 '사의 찬미' 음반. 지독하게 앓는 사랑의 열병이었을까? 아니면 순간의 선택이었을까? 나는 이런 사랑 이야기를 보거나 들을 때면 가끔 생각한다. 대체 인생의 전부를 다 잠식해들어가는 저 감정은 무엇일까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