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히 신구 할아버지와 이순재 할아버지가 나오신다는 연극 광고를 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2월 안에 예매를 하면 할인을 해주는 이벤트 중이기도 했는데 신구 할아버지, 채수빈, 조달환, 요 캐스팅으로 보고 싶었지만 그렇게는 맞출 수가 없었다. 결국 눈물을 머금고(?) 신구 할아버지를 포기하고 이순재 할아버지가 나오시는 공연으로 예매! 대학로 유니플렉스는 처음 가봤는데 2층 좌석도 시야가 괜찮아서 좋았다. 문제는 퇴장하는 관객들이 엘리베이터 이용이 어려워서 지하 3층부터 하염없이 걸어 나오는데 꽤 많은 체력이 요구된다는 점, 다리가 후들거리더라.
파리에 한 아파트에서 혼자 살고 있는 앙리할아버지, 할아버지의 아들인 폴은 아버지의 건강을 염려하여 감시역겸 간병인을 구하는데 시골 아가씨 콘스탄스가 입주하게 된다. 피아니스트를 꿈꿨지만 아버지의 독설과 피아노를 지긋지긋하게 만드는 선생님 덕에 때려치우고 방황하는 청춘인 콘스탄스는 앙리할아버지네 거실 피아노를 건드렸다는 이유로 입주 첫날 쫓겨날 위기에 처한다. 사정하는 콘스탄스에게 앙리할아버지는 입주 유지와 6개월 방세 면제에 (우리나라 일일, 아침 드라마에서 볼 법한) 막장의 향기가 풀풀 풍기는 제안을 하고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그녀가 그 제안을 받아들이면서 묘하게 뒤섞인 막장과 성장, 가족 드라마가 시작된다.
연극을 보면서 전에 읽었던 『할머니가 미안하다고 전해달랬어요』가 생각이 났다. 앙리할아버지는 주변 사람들과 계속 갈등을 겪는다. 맘에 안 드는 아들, 유별난 며느리, 그리고 거래를 통해 한팀이 된 거 같지만 죄책감을 느끼는 콘스탄스까지... 콘스탄스 이전의 세입자들은 얼마 버티지 못하고 나갔고, 가족들과 평온하게 한끼를 같이 먹는 것도 쉽지 않다. 하지만 콘스탄스와의 동거를 통해 앙리할아버지는 소설 속 엘사의 할머니처럼 (비록 친손녀는 아니지만,) 콘스탄스의 슈퍼히어로가 되어 준다. 콘스탄스도 앙리할아버지가 모든 사람에게 잔소리처럼 하시는 감기 걸리니까 옷 제대로 입고 다니라는 얘기가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었음을 알게 된다.
앙리할아버지의 심경 변화가 다소 갑작스러워서 나는 사실 그 지점에서도 할아버지에게 다른 꿍꿍이가 있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그건 아니었다. ^^;;; 마지막 콧등이 시큰해지는 지점에서 신구 할아버지의 앙리할아버지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웃음 지분의 80% 이상은 조달환 배우가 맡은 폴이 담당한다. 아내를 사랑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하고, 갑작스러운 취향저격의 유혹에 다리가 풀리기도 하고, 허세를 부리기도 하는 폴은 아버지만큼이나 감정표현에 서툴지만 아내를 아끼고 가족을 중요시하는 사람이었다. 조달환 배우 덕에 더 재미있게 본 거 같다.
집으로 오다가 곰곰히 생각해 보니 우리 아버지께서 엄마랑 외출할 때마다 엄마 꼭 붙잡고 다니라고 하시는데 (우리 어머니 자주 넘어지신다) 문득 그게 아버지한테는 사랑한다는 말의 다른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ㅎㅎ